영화<아들의 방>은 아들을 잃은 가족이 슬픔을 조용히 체화해 가는 영화다. 난니 모레티감독의 시선만큼이나 관조적이지만 감독 역시 가족의 죽음과 슬픔에 대해 뚜렷한 정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겨우 정상적인 일상으로 회귀한 가족의 모습은 극복이라기 보다는 단지 삶을 사는 것 뿐이다. 그럭저럭 일상생활은 할 수 있지만 가슴 속에 아들의 방은 그대로 놔둔 채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간다.

아버지 조반니는 끊임없이 아들이 죽은 날 아침을 떠올린다. 그날은 아들과 조깅을 하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환자에게서 급한 연락을 받아 조깅 약속을 취소하고, 아들은 대신 친구들과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갔다가 그대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날 아침 환자를 보러가지 않고 예정대로 아들과 조깅을 다녀온 자신의 모습을 조반니는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그가 아들의 죽음을 감당하는 방법은 그저 그날 일요일 아침에 아들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경우들을 계속 상상해내는 것 뿐이다. 그러한 시뮬레이션이 정교해져 갈수록 아들이 죽은 현실은 선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인간은 죽음을 가진 존재라는 걸 의식하면서 오히려 삶을 되찾아가려고 노력한다. 아버지 조반니는 사회적 가치관과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며 살아왔지만 인간은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삶에 대한 가치관을 전면 수정하고, 자유롭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을 찾아가려고 노력한다.

2001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영화 <아들의 방>은 로베르토 베니니와 함께 이탈리아의 대표적 감독인 난니 모레티가 만든 작품으로 또한 그가 주인공 ‘조반니’ 역을 맡았다. 처음엔 주인공이 감독 자신인줄 모르고, ‘정말 지적인 느낌의 배우’라고만 생각했다.

영화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주로 조반니의 직장생활과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조반니의 사회적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그런 모습 속에서 지겨움을 낙서로 달래고, 권태에 시달리고,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조반니를 보면서 사회적 페르소나에 억눌린 개인적 자아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후반부는, 사회적 자아가 무참하게 깨지면서 개인적 자아가 전면으로 드러난다.

아들이 죽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그는 직장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직장을 그만둔다. 지혜롭고 현명하던 아내도 아들의 과거 여자 친구에게 병적으로 집착하고, 딸도 운동경기 중 상대편 선수와 싸워 퇴장 당한다.

그러나 행복은 결여의 순간에 찾아온다. 아들이 죽은 후 조반니는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존재고, 누구든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누가 뭐래도 자기가 좋으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통렬하게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간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직장을 그만두고 겉치레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면서 그는 서서히 자유로워지고 약간씩 행복한 느낌, 살아있는 느낌을 되찾아간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반니는 아들의 여자친구를 국경까지 차로 태워 준다. 아들의 여자 친구가 새로 사귄 남자 친구와 여행을 떠나는데 배웅을 나온 것이다. 이전의 그라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처녀가 집을 나와 그것도 남자와 여행을 떠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보수적인 어른의 사고에 길들여진 예전의 그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에게는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됐고, 더 자유로워졌기에 이런 배웅까지 나올 수가 있는 것이었다.

조반니는 근본자아로 살아갈 때 영혼이 만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난니 모레티 감독은 시종 잔잔하면서도 조용하게 영화를 펼쳐낸다. 음악을 통하여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준다.

가슴에 여운을 남겨주는 음악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생각케 해주는 고마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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