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학박사 정 영 오

청렴연수원 청렴교육전문강사

지난 4.13 지방선거기간 동안 중단하였던 ‘주민과 함께하는 지방자치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그동안 43회에 걸쳐 연재하였던 기고문을 2018년 4월부터 8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중단하였던 것은 필자의 졸고가 예민한 지방선거판에 영향을 미쳤다는 털끝만한 오해도 받기 싫어서였다.

이번 호부터는 필자가 국민권익위원회 청렴연수원 ‘청렴교육전문강사’로서 여러 공공기관의 공직자를 대상으로 강의해 온 내용을 정리하여 싣고자 한다. 청렴을 실천하는 것은 공직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국민 모두의 의무이자 과제일 것이다. 그것은 누구든지 청탁과 금품 수수 등의 당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청렴 1등 도시’를 지향하는 함평군의 올곧은 주민들과 공직자들이기에 더 필요한 소양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 부족한 글이지만 싣고자 한다.

조선시대 국전인 ‘경국대전’에서는 분경금지를 규정하고 그 행위에 대하여 장(杖, 몽둥이) 100대· 류(流,유배)3,000리로 엄하게 처벌하였다. 奔競은 달릴 ‘奔’과 다툴 ‘競’을 합한 것으로 ‘바쁘게 다니며 이익을 다투는 것’을 뜻하는데, 벼슬을 얻기 위해서 권세 있는 집을 분주히 찾아다니며 청탁을 하는 풍습을 가리킨다.

정종대의 실록기사를 보면 조선 초기 분경을 금지하는 취지가 잘 나타나 있다. 정종의 하교를 보면 당시 분경을 금한 취지가 지금의 청탁금지법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원통하고 억울하여 고소할 것이 있거든, 각기 그 아문이나 공회처(公會處)에서 뵙고 진고하고, 서로 은밀히 참소하고 헐뜯지 말라”. 즉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 사적으로 만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금해지지 않으면 “장차 반드시 우리의 맹호(盟好, 마땅한 약속)를 저해하고, 우리의 종실을 의심하며, 우리의 군신을 이간하는데 이르고야 말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분경금지가 조선시대에 엄하게 시행된 것은 관원들이 서로 사당을 만들어 인사권과 사법권이 문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조선의 통치는 조직적인 관료체제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분경은 그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범죄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청탁이 있었는지를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분경금지는 청탁의 구체적인 입증 없이도 집안에 출입하는 자체만으로도 처벌을 가함으로써 사실상 청탁을 추정 또는 간주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교류가 주로 관헌이나 정자보다 개인의 사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 사가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보다 적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방문을 금할 경우 청탁이 없는 순수한 교우나 경조를 위한 방문도 함께 처벌 받을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따라 일정 범위의 친족에게는 분경이 금지되는 대상 관료의 집에 예외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경우를 허용함으로써 처벌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분경금지는 분경이 금지되는 대상 관원의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당상관과 양사(兩司)의 관원, 판결사(判決事) 등에 제한하여 인사권과 사법권을 직접 행사하는 관원과의 사적인 방문을 금지하였다. 분경이 금지되는 시기를 도목(都目, 근무성적 평정)과 서경(署經, 인사발령)의 인사권이 행사되는 시기로 한정함으로써 청탁의 입증 없이 집안을 방문했다는 것만으로 처벌하는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소하였고 분경금지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분경을 행하는 자들은 벼슬을 하고자 하는 사대부들인데, 정작 적발되는 것은 그들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비부(婢夫)와 반인(伴人)들이었다. 이들을 분경으로 처벌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을 당시 사법에서도 인식하였던 것이다. 세종이 제시한 책제는 분경금지의 딜레마적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분경을 금지하는 것은 비록 벼슬을 얻기 위하여 조급히 날뛰는 풍습을 누르기는 하지만, 대신에게 사대부를 접촉하지 못하게 하여 인재의 현부(賢否, 어질고 그렇지 못한)와 시정의 득실(得失)을 알지 못하게 만드니 접촉을 금지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나 이를 금지하지 않는다면 무턱대고 벼슬 얻기만 노리는 자들이 날마다 집정자의 문에 있을 터이니, 어떻게 하면 대신으로 하여금 듣고 보는 길을 널리 열어 놓으면서도 선비들의 분경을 없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조선시대 분경금지 제도의 문제점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분경금지와 지금의 청탁금지법은 시대와 정도는 다르겠지만 문제의식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당시 분경을 둘러싸고 일었던 조선시대의 논의는 청탁금지법을 둘러싼 지금의 논의들과 너무나 유사하게 느껴진다. 분경에서 문밖의 만남은 금지하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떳떳하면 만나는 것을 숨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속담처럼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것을 되새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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